여성의 존재와 성 인식
페이지 정보
작성자이레미션 조회 25회 작성일 25-04-20 17:55본문
과거에는 남아선호사상이 있던 시절, 우리 여성들에게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여성이라서 모자라다”는 말은 그중 대표적인 표현으로, 사회적으로 여성의 능력을 폄하하는 편견 어린 언어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다양한 연구에 따르면, 여성은 지적 성숙도와 정서적 판단력, 관계 조율 능력 등에서 오히려 남성보다 더 높은 역량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남성들은 현재의 자극에만 반응하는 경향이 있으며, 욕구를 즉각적으로 해소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해 충동적으로 대응하고,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아무 여자와 본능적 욕구를 충족하고 독립적으로 해결하려는 성향을 보이곤 합니다.
이에 비해 여성들은 본능적 욕구를 상황에 맞게 조절할 수 있는 내면의 지혜와 인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여성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여성은 충동적 대응보다 정서적 흐름과 분위기를 더 중요시합니다.
그러한 배려와 인내는 단지 자기조절의 능력이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을 어루만지는 치료자의 본성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여성은 타인을 세워주고 위로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며, 공동체의 아픔을 함께 회복시키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반면 사회는 여전히 “여자를 잘못 만나서”, “집안에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꽃뱀” 등의 말을 사용하며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유교적 사고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는 남성의 잘못을 여성에게 덮어씌우려는 억지 논리이며, 시대착오적인 편견입니다.
여성이 있기 때문에 인류가 태어났고, 여성의 지적 능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남성들은 가정을 지키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바르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여성들의 눈물과 돌봄이 없었다면 독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며, 신앙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은 여성들의 순종과 증언을 통해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여성들은 자신의 신체가 성적으로 대상화되어 왔다는 점을 비판하며, 인권이라는 이름 아래 성문화 전반에 대해 강한 억제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여성의 권리 보호와 성적 대상화에 대한 경계는 당연히 중요하지만, 동시에 인간 본연의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욕구에 대한 이해도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특히 남성은 여성의 따뜻한 말과 신체적 아름다움을 통해 심리적으로 위안받고, 감정이 안정되며 이성적 판단력도 회복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외로움과 긴장감 해소를 위한 정서적 반응이기도 합니다.
또한 생물학적으로 남성은 약 48시간에서 72시간, 또는 개인차에 따라 30일 이내의 주기로 정자 생성과 방출을 위한 성적 긴장 주기를 경험합니다. 이는 남성의 고환에서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정자가 일정 수준 이상 축적되면, 내분비계의 작용과 자율신경계의 자극으로 인해 신체적 긴장감이나 해소 욕구로 나타나는 것으로, 일부에서는 이를 ‘남성의 월경기’ 또는 ‘성적 긴장 주기’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기에는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 수치가 일시적으로 상승하며, 성적 충동과 환상이 자극되기 쉬운 상태가 됩니다. 이때 남성은 지극히 가까운 사이이거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여성에게도 성적 상상이나 망상을 느끼는 경우가 있으며, 이는 병리적이기보다 생물학적 긴장 해소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여성도 리비도(libido) 즉, 성적 욕망을 경험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호르몬 주기(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에 따라 변화하며, 정서적 친밀감과 감성적 요소에 의해 성적 욕구가 더 강하게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성과 달리 성적 충동의 주기와 강도가 상대적으로 길고 변동폭이 크며, 인지적 조절 능력이 더 높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남성은 호르몬 분비와 생식세포 축적, 그리고 뇌의 시각적 자극 처리 특성 등으로 인해 짧은 간격의 성적 긴장 주기를 겪으며, 이는 정상적인 생리학적 반응입니다. 다만 이러한 충동을 어떻게 표현하고 다루는지는 개인의 도덕성, 사회적 교육, 그리고 정서적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처럼 남성은 연인이나 배우자가 있는 경우에는 포옹, 스킨십, 따뜻한 교감 속에서 이러한 성적 욕구를 자연스럽게 조절하거나 해소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부는 윤리적이고 안전한 성 미디어를 통해 정서적 안정과 신체적 균형을 유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성 미디어에 대한 지나친 금기와 억제는 일부 남성들에게 해소할 수단을 박탈하게 되고, 억눌린 성 충동은 왜곡된 방식으로 분출될 위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성적 판단력이 흐려지는 특정 시기(정자 방출 주기)와 맞물릴 경우, 극단적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갖고 접근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을 억제와 금지의 대상이 아닌, 건강하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해소하고 다룰 수 있는 ‘사람 중심의 성문화’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성폭력 예방은 물론, 성을 둘러싼 갈등과 오해를 줄일 수 있는 실질적인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법과 규제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성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며, 성적 에너지를 건강하게 다루는 일은 개인의 정신 건강, 일상생활, 그리고 인간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특히 청소년과 장애인들에게는 ‘성’을 죄로만 규정하기보다, 정서적 돌봄과 자아 이해의 관점에서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다른 나라들도 성 미디어를 처음부터 자유주의적으로 허용한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미국이나 유럽의 몇몇 국가는 성범죄가 극심해졌을 때, 오히려 성 미디어를 합법화하면서 동시에 아동과 여성 대상의 성범죄에는 ‘최대 징역 100년’, ‘150년형’과 같은 초강력 형벌을 병행 적용하여 사회 전체의 균형과 보호를 꾀했습니다. 즉, 범죄는 철저히 단죄하고, 개인의 건강한 성적 해소는 제도적으로 안내한 것입니다. 성 해방이 아니라, 성 안전의 실현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는 건강한 성 미디어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음지에서 자극적이고 비윤리적인 콘텐츠를 소비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남성들이 왜곡된 성 인식을 갖게 되고, 특히 여성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구조로 이어져 미혼모 문제, 낙태, 성폭력 증가 등 심각한 사회적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또한 장애인들에게 먼저 다가와 “같이 살아보자”고 따뜻하게 손 내밀며, 자연스럽게 신체적 교감이나 정서적 친밀함을 나누려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애’라는 단어 앞에서 스스로 벽을 세웁니다. “도와주겠다”는 말은 해도, 진심으로 곁을 내어주거나 함께 삶을 나누려는 시도는 드뭅니다. 오히려 ‘안쓰럽다’거나 ‘희생해야 한다’는 식의 시선이 앞서며, 진정한 관계 형성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장애인들의 성적 감정은 어디에서 머물고, 또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 걸까요? 장애가 있다고 해서 사랑하고 싶고, 누군가를 품고 싶은 마음까지 감춰야만 할까요? 성적인 욕구는 단지 육체적인 차원을 넘어서, 외로움, 인정받고 싶은 갈망,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어우러진 ‘사람다운 욕구’입니다.
여성의 월경기나 남성의 정자 방출 시기에는 누구나 정서적으로 예민해지고, 외로움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들은 육체적 통증뿐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정서적 불안정성을 견뎌야 하고, 남성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종족 보존 욕구와 외로움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장애인의 경우, 이러한 자연스러운 성적·정서적 리듬을 나눌 상대가 없다는 사실이 더욱 큰 고통이 됩니다. 그 누구도 진심으로 안아주지 않고, ‘함께’라는 말이 허공에 메아리칠 때, 그들의 고독은 상상 이상이 됩니다.
이 문제는 비단 장애인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 사회의 아동과 청소년들 역시 왜곡된 성 인식 속에서 방치되고 있으며, 남성들 또한 감정의 조절이나 관계 형성의 어려움 속에서 고립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고,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혼자 견디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을 위한 따뜻하고 안전한 돌봄의 장이 우리 사회에 필요합니다. 그 중심에 바로 ‘여성’이 설 수 있습니다. 여성은 단지 성적 대상이나 방어자가 아니라, 감정을 이해하고 품어주는 ‘치유자’이자 ‘공감의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성의 품은 단순한 위로가 아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공간이자 성숙한 관계의 훈련장이 될 수 있습니다. 여성의 자애로움은 장애인의 외로움을 녹이고, 청소년의 혼란을 정돈하며, 남성의 과잉된 욕구와 고립을 건강한 방향으로 이끌어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성 미디어는 단순한 자극이나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정서적 해소와 자기존중을 위한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함께 논의되어야 합니다. 성은 죄악이 아니라 ‘생명’이며, 인간이 건강하게 누려야 할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입니다.
이 영역에서 여성은 방어자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회복과 공감의 조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을 억제하거나 외면하기보다, 따뜻하고 윤리적인 해소 문화를 함께 만들어갈 때 우리는 왜곡된 성 인식을 바로잡고, 진정한 동반자 문화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여성이 있기에, 장애인도 아동·청소년도 남성들도 돌봄과 이해 속에서 ‘사람다움’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여성의 따뜻한 품은 외롭고 상처받은 이들의 삶에 온기를 불어넣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전합니다.
여성은 그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공감하고, 품어주고, 회복을 이끄는 존재—그것이 바로 여성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여성의 따뜻한 품은 누군가에게는 치유가 되고, 세상을 향해 다시 나아갈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이 사회가 진정으로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억눌린 욕구와 외로움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정죄가 아닌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서적 돌봄과 관계의 회복을 통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아야 합니다.
그 시작은 거창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저 누군가의 아픔을 내 일처럼 여기는, 한 사람의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더 이상 손가락질도, 침묵도 아닌, ‘품어주는 사람의 마음’이 절실합니다. 그리고 그 따뜻한 품이, 바로 당신일 수 있습니다.